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문단 편집) == 생각해 볼 점 == 흔히 [[페미니즘]] 진영에게 본서나 본서의 저자 소머스는 조리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서는 막연히 [[백래시]]라고 매도당하기에는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본서는 남성들에게 전혀 엉뚱한 맥락에서 오용되는 경우도 있으며, 그 메시지가 남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 '''우격다짐 식으로 강행된 젠더 평등 정책들''' 현대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은 "남자 새끼가 되어 가지고 처맞고 들어오냐!" 의 호통이 뭔가 구시대적이라는 것 정도는 납득하지만, 폭력의 사회화를 막는답시고 다섯살바기 남자아이들이 뒤엉켜 노는 것을 억지로 떼어낸 뒤 혼을 내고, 유치원생이 맥가이버칼을 챙겨서 소풍을 나왔다고 소년원에 구금한다면 그건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회학]]과 [[여성학]]에서 제기되는 문제의식이 교육 현장에 개입 프로그램으로서 적용될 때, '''그 적용은 협의라기보다는 관철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평등과 같은 인류보편적 가치는 타협의 대상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프로그램이나 [[엄벌주의]]로 평등을 관철시킨다면, '''그것은 과연 진정한 평등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반발하는 구성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지 않으면 평등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불구적인 비관론일 수도 있고, 엄벌주의적 접근이 아니고는 사회구조적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우울한 메시지일 수도 있다. 이처럼 본서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에 대한 젠더 운동가들의 막연한 태도를 비추어 보여주고 있다.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흔히 "어떻게 페미니즘을 가르칠 것인가" 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오늘날의 페미니즘 교육은 페미니즘에 [[안티페미니즘|공개적으로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학생 혹은 학부모들의 반응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학교 교실에서 젠더문제는 생소한 주제가 아니며, 학생들도 더 이상 "아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군요~!" 를 외치는 [[빈 서판]] 같은 존재가 전혀 아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자꾸 반발 여론이나 반페미니즘적 사례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쪽에 이끌리게 된다. 이것은 오히려 교사로서의 권력을 활용하는, 권력작용에 더 가까운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사상 강요를 하지 말라"''' 는 여론도 나올 수 있으며, 이는 10대 학생들이 특정 사상에 대한 정치적 관여(political engagement)를 원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을 설득하고자 한다면, 페미니즘 교사들은 응당 이에 대한 논리적인 대답을 먼저 준비해야만 할 것이다. * '''페미니즘 교육자들의 사회적 결정론''' 위에서 이미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해 비판하기는 했지만, 본서에서 보여주는 젠더 운동가들과 교육계의 '''사회적 결정론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그 못지않게 잘못된 것이 사실이다]].''' 112페이지에서 저자가 언급했던 웰즐리 칼리지의 제안, 즉 유치원생 소년들에게 하이힐을 신기고, 유치원에서 노는 동안 의무적으로 치마를 입히게 하자는 내용은, 이미 성의학계의 유명한 실패 사례인 '''[[데이비드 라이머]]'''(D.Reimer)의 비극을 되풀이하려는 시도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키워 내려는 소년들이 '남성' 으로서의 면모를 자꾸 드러낸다 해도, 자신들의 방법론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의심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가부장적 사회구조라는 '어른으로서의 인식론' 에 갇힌 채로, 어린 소년들이 인식하는 세계는 가족과 [[유치원]]이 전부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유치원생들이 유치원 바깥의 '''더 큰 사회적 압력을 경험할 기회 자체가 많지 않음'''에도, 그들은 그 사회적 압력이 유치원생들의 젠더 규범을 결정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듯 보인다. * '''"[[잉여인간]]" 들을 위한 변호''' 본서는 어떤 남성들을 조명하고 있을까? 막연히 상상될 법한 그런 성실한 고학력 [[모범생]] 남성들을 조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서는 '''문제아, 학업부진아, 일진, 사고뭉치, 말썽꾸러기, 비만아 등의 [[잉여인간]]을 조명'''하며, 성실한 고학력 모범생 남성들은 아예 처음부터 논의에서 배제한다. 본서가 관심이 있는 것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늘 교사의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모를 '떨거지' 들이다. 수업 중에 자꾸 몸을 비틀고 의자에서 내려와 돌아다니고 준비물은 멋대로 빼먹고 여학생들에게 시비를 거는, 얼굴에 심통이 가득한 남자아이들이 바로 저자의 관심 대상이다. 본서는 이런 소년들이 여학생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에 가장 적절한 교육은 (마치 5장에서 암시하는 듯한 군사학교처럼) '''엄격하고 명확한 규율로 지배되는 교실'''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본서는 "이런 피 끓는 남자애들이 살 길은 [[야간자율학습|새벽까지 책상에 붙어앉아서 닥치고 외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가서 공부해라]]" 라고 말한다. 이건 어찌 보더라도 국내의 '악명 높은' 소위 '''입시명문 사립고들에서 재학생들을 관리하는 논리'''이며, 국내의 대다수 남성 독자층이 썩 기분 내킬 만한 조언은 아니다. 소위 '어른들 하라는 대로 얌전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 왔더니 뒤늦게 페미니즘의 날벼락을 맞은' 남성들의 입장에서, 본서는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느껴지기는 어렵다. 아마도 저자는 그런 남성들에 대해서는 그저 '주어진 여성편향적 교육환경에 자기 자신을 잘 적응시키는 데 성공했던' 운 좋은 사례일 뿐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여교사들이 남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교원들은 대표적인 [[여초]] 직종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교육 현장에서의 교원들의 남녀동수(parity)를 달성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구직난이 어렵다 해도 남성들은 초등교육 교원에 있어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본서는 '''임용고시 내지는 초등학교 실무 배치를 앞두고 있는 여성 교생들'''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내용일 수 있다. 국내의 교육환경 역시 '[[모범생|얌전하고 성실하게 장시간 앉아서 선생님 말씀을 듣는]]' 학생들에게 유리하므로,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있다면 '''교육계의 누군가는 그들을 변호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 교사들은 [[우등생|그 자신이 얌전하게 열심히 공부한 학창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이므로, 자신과는 다른 학창시절을 보내는 열등생 소년들을 접하면 이해하기보다는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문제거리' 들을 어떻게 대할지는 많은 교사들이 [[교생]] 내지 초임 시절에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